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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적인 사랑의 열매(II)
김형태 박사(전 한남대학교 총장)
 
편집국   기사입력  2016/04/22 [14:43]
▲ 김형태 박사(전 한남대학교 총장)     ©편집국
강영우 박사의 부인되는 석은옥 여사의 고백을 계속 들어보자.(전호에 이어)
 
“게다가 처음으로 가보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이 겹쳤다. 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때까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누나를 보내고 혼자 힘으로 다가오는 대입을 준비해야 했고, 부담과 불안이 겹쳐 이별의 고통은 가중되었다. 내가 떠난 뒤, 동생 영우는 마음을 독하게 고쳐먹고 대학입시에 전념했다. 그리고 1968년 연세대 문과대 교육학과에 입학원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맹인이라는 이유로 입학원서 자체를 접수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입학원서조차 낼 수 없다니 그 소식을 들은 나는 미국 땅에서 그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발만 동동 굴렸다.
 
그런데 4주 정도 지나 또 한 장의 편지를 받았다. 영문과 교수 한 분이 대필해주어 입학시험을 무사히 치르고 교육학과에 10등으로 합격했다는 것이다. 순간 나도 모르게 감격과 감사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1968년 3월 서울맹학교 고등부에서 연세대에 입학해 그동안 빡빡 깎은 머리를 기른 채 교복대신 신사복을 입고 찍은 사진도 보내주었다. 정상인들과 같이 공부하여 잘 적응할 수 있을까?하고 걱정했는데 첫 학기부터 장학생이 되었다는 편지가 날아왔다. 나는 15개월 만에 귀국했다. 그 동안의 이별은 우리 두 사람의 관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더 이상 누나 동생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으로 서로를 바라보게 된 것이다. 1948년 12월 22일 학기말 시험을 마치고 함께 연세대 백양로를 걷던 중 영우가 내게 사랑을 고백했다. 나도 그를 무척 좋아한데다 남은 생을 시각장애인 교육에 헌신하려고 준비해왔는데 그를 반려자로 맞으면 남편에게 맹인 동생을 이해해달라고 할 필요도 없으니 잘 됐다고 생각했다.
 
나는 영우의 사랑을 받아주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장래를 약속한 우리 두 사람은 너무나 행복했다. 우리 두 사람은 비밀리에 약혼식을 올렸다. 무남독녀 외동딸을 둔 홀어머니가 애지중지 기른 딸을 맹인에게 준다는 것은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절대로 안 된다!”며 반대하셨지만 결국 딸의 고집을 꺾지는 못하셨다. 친구들은 더 심했다. 어떤 친구는 다시 한 번 내 얼굴을 쳐다보며 “관상을 보면 팔자가 그렇게 센 것 같지는 않은데 하나님이 해도 너무 하셨다. 아무리 공부를 잘하고 학벌이 좋으면 뭐하니? 너는 좋아서 결혼한다 해도 그 사이에서 태어나는 자식들을 생각해봐 아버지가 장님인데.”하고 말렸다.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72년 2월 26일 대학생이던 약혼자를 졸업하기까지 만 3년이나 기다린 끝에 드디어 나이 서른이 다 되어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난 다른 친구들에 비해 결혼이 늦은 편이었고 모두 판사, 의사, 약사, 대기업 간부의 부인이 되어 있을 때 연하인 맹인 학사를 신랑으로 맞은 것이다. 그래도 어찌나 행복하고 감격스러웠던지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아 하객들의 놀림을 받을 정도였다.
 

맹인 아내로서 내가 겪은 고통
1972년 8월 우리 부부는 가슴에 큰 뜻을 품고 LA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당시에는 장애가 해외유학의 결격사유에 속했다. 그 항목을 삭제하고 한국 장애인 최초 정규 유학생이 될 때까지 겪은 마음고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결국 피츠버그 대학교 9월 학기 개강을 1주일 정도 앞두고 한미재단 총재와 연세대 총장이 공동으로 제안한 청원서에 문교부장관이 서명함으로써 미국 유학의 가장 큰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LA에 도착해 여러 해 동안 그의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해주던 양부모님을 만나 1주일을 보내고 피츠버그에는 개강 전날 도착했다.
 
당시 나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많이 지쳐있었다. 서울을 떠나기 직전까지 맹인재활센터에서 일했고 입덧도 심했다. 그러나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면서 돕지 않으면 강의실에도 갈 수 없어 편하게 쉴 수도 없었다.
하루는 남편을 강의실에 들여보낸 뒤 도서관에서 책을 녹음하다 깜빡 잠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강의가 끝난 지 30분 이상 지난 시간이었다. 온 힘을 다해 강의실로 뛰어가 보니 그는 불안한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보!”하고 부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어디 갔다 이제 왔느냐며 화를 버럭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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